
해원의 아침묵상 / 2017. 10. 2 (월)
■ 예레미야 8:18-9:6
[ 고생할 만큼 했는데 왜 회복되지 않을까 ]
예레미야 선지자는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라고 탄식합니다(18).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영적인 중병에 걸린 백성, 구원을 받을 가망이 없는 나라, 끝없이 밀려드는 바벨론의 군대, 그리고 그러한 백성들을 위해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지자는 마음에 깊은 병에 걸린 듯 할 수 있는 것은 통곡뿐입니다.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구원을 확신했지만 이제 조국의 멸망과 백성들의 고통을 보면서 슬픔 속에 기진맥진한 선지자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뿐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던 예레미야는 심판의 상황을 보며 깊은 마음의 병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잡혀가서도 끝까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까닭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국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안전한 것이라고 확신했던 자신들의 신념이 허망하게 무너진 것을 슬퍼하며 탄식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보호하시지 않았음을 탄식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을 의지한 죄를 탄식해야 했습니다(19). 이스라엘은 삶 속에서 신정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통치받으려고 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왕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켜주실 것이며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는 신앙심이 두터운 것이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 것이며, 자신들의 죄에 대해 무지한 까닭입니다. 율법으로는 태산같은 지식이 있으나 그 지식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했으며, 오직 하나님과의 신앙적인 관계 속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떤 교단에 속해 있고, 어떤 교리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를 자랑하기 전에, 진실로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순종하며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평가하는 기준에 따라 내 자신을 맞추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니 우리는 구원을 엊지 못한다"고 탄식합니다(20). 어리석고 미련한 자의 원망입니다. 고생할 만큼 고생했고 세월이 시간이 지날만큼 지났는데 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는지를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추수기가 지났음을 언급한 것은 그들이 고생한 만큼의 결실을 얻지 못해 식량난에 허덕인다는 것으로서, 전쟁으로 인해 땅이 폐허가 되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도 추수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폐허가 된 이스라엘에 남은 자들도,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들도 추수기와 상관없이 고통 속에서 굶어 죽어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을 따라갔으며 자신들의 기대와 감정을 따라가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원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를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섬기듯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다른 종교에서 섬기는 신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일하신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과 성도는 언약 안에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신랑되신 하나님을 떠난다면 신부된 성도의 삶은 피폐해지고 모든 공급이 끊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라고 탄식하십니다(21). 이스라엘 백성들이 치료 불능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굵은 베를 두르고 머리에 재를 쓰며 지금이라도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 돌이키신다면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겠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지키시는데 왜 예루살렘이 짓밟혀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9). 이는 곧 환자 스스로 자신의 질병을 깨닫지도 못하고 치료도 거부하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오히려 말씀을 듣는 중에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다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지 됨인고"라고 탄식합니다(22). 이는 이스라엘이 중한 질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치료받지 못한 것은 약이 없어서도 아니고 의사가 없어도 아닌, 오직 자신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지 못하고 그로인해 하나님의 긍휼함도 얻을 수 없게 되었음을 슬퍼한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울어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면 주야로 눈물을 흘리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레미야는 자신의 지혜로도 슬퍼하며 흘리는 눈물로도 예루살렘을 구원할만한 힘이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9:1).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일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무엇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울어도 전쟁으로 인한 살상의 비참함은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이 무너지는 모습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어가고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는 선지자는 주야로 울어 눈물이 마를 정도가 되어도 그 슬픔과 아픔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행므과 우상숭배로 인한 심판으로 고통받는 백성의 모습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어 차라리 예루살렘을 떠나 그들이 보이지 않는 광야로 들어가기를 바랐습니다(9:2). 이러한 참혹한 현실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지 않는 까닭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활을 당김같이 진실함으로 행하기 보다는 돌이키기 어려운 거짓으로 끝임없이 쏟아내면서도 하나님을 외면하였습니다(9:3). 이처럼 하나님으로 부터 완전히 떠난 유다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유다를 향해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9:4-5). 하나님을 향한 진실의 자리에 거짓이 들어 앉아있고, 이웃에 대한 신뢰의 자리에 비방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도 전에 그들 사회가 스스로 와해되어 가고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오늘도 진실을 말하면 손해보는 일이 많고, 편법과 불법을 동원해서라도 이웃을 도태시켜야 내가 성공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되고 정직과 공의를 바로 세워가야 할 이유입니다. 거짓과 불법이 가득한 시대에 나 하나쯤이야 하는 마음이 아니라, 나 혼자서라도 정직히 행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의 기도>
나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 하기 전에, 오히려 내 자신의 고생만을 생각하며 회복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는지 돌아 봅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수확을 기대하는 마음보다 마땅히 드려야 할 나의 헌신을 드리지 않았음을 먼저 부끄러워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