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원의 아침묵상 / 2017. 10. 21 (토)
■ 예레미야 17:12-18
[ 재앙이 아니면 죄악을 깨달을 수 없는 지경에 까지 ]
유다는 바벨론의 침략 앞에 앗수르와 애굽이 동맹이 되어 도와줄 것이며, 예루살렘의 견고한 성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소망은 앗수르도 애굽도 예루살렘성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영화로우신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우주 만물과 인생을 통치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성소가 되셔서 아무도 넘보지 못할 피난처가 되시고 소망이 되십니다(12). 유다의 피난처는 그들이 섬겼던 깎아 만든 바알과 아세라도 아니며, 그러한 우상들을 섬김으로 얻을 수 있었다고 하는 풍성한 재물도 아닙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맹렬한 진노의 불 앞에서 모두 타버릴 것들이며,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짓밟힐 때에나 끌려가 고통을 받을 때에도 아무런 능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 모든 환란이 유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선포하셨고,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다시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시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16:15). 이는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유일한 통치자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 자신의 탐욕이 원하는대로 행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생수의 근원되신 여호와를 버린 자들은 흙에 기록한 글자가 비바람에 지워지듯이 허망하게 끝날 것입니다(13). 어디에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권위도 없고 상징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를 증거합니다. 출애굽이후 이스라엘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실 때마다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구원하여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뿐만아니라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정착하여 성읍을 이루고 해마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둘 수 있는 풍족한 상황 속에서도 유일한 소망이 여호와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소망으로 두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 자신의 삶의 근거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계3:5). 우리의 인생을 먼지에 기록하려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찬송이 되시고 치료자가 되시며 구원이 되십니다(14). 유다가 처한 상황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불가능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조성하시며 세워가시기 때문입니다. 죽음 가운데에서도 생명을 지으신 분이시며 황폐함 속에서도 풍성한 결실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처한 상태를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라고 탄식하였습니다(15:18). 상황이 그들 스스로의 눈으로 볼 때에 더 이상의 소망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웅덩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유다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시86:5). 이는 하나님의 근원적인 성품이 저주로 인한 멸망이 아니라, 죄에 대한 진노에서 자기 백성을 구별하셔서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다는 맹렬한 진노의 불길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까지도 스스로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왜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하며 자신들의 고통을 거두어가시기만을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악함은 단순히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향해 "여호의 말씀이 어디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라고 조소하였습니다(15). 하나님의 심판으로 성읍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이며 백성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전에서 바벨론의 침략이 가시화 되고 있고, 자신들의 삶 속에 우상숭배와 음행이 만연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에게 심판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핍박했을 뿐만 아니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대라고 하며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다"라고 합니다(16). 즉, 하나님의 말씀이 곧 실상이요 증거가 되며, 지금까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민족이 재앙으로 인해 멸망을 당할 것을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마음도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선지자로서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앙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나 백성이 재앙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는 말씀을 전할 뿐, 그 선포되어진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유다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선지자에게 증거를 대라고 하고 있습니다. 죄악 속에 빠진 인생, 물질의 탐욕에 물든 인생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목전에 왔음에도 증거를 요구하고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유다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예레미야 선지자는 재앙의 날이 임하게 해달고 간구합니다(18).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재앙의 고통을 주시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곤 합니다. 그 질문 앞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재앙의 고통이 아니면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맹렬한 진노의 불과 같은 재앙이 아니면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이나 음행을 떨쳐 버리지 못할 것이며,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도 회개하지도 못할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 이러한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였는가?"라는 그들의 질문 앞에서, 예레미야는 진노의 손길을 거두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맹렬한 불로 다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레미야는 완고한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재앙으로 인한 고통과 치욕이 아니고서는 그들이 결코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이시이다, 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게 마옵소서 그들은 놀라게 하시고 나는 놀라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17-18).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러한 반응은 유다백성이 당할 고통을 자신은 면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지자는 누구보다 더욱더 깊고 아픈 상처와 고통을 민족과 함께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 직분의 정당성을 보장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즉, 재앙을 통해 하나님께 부름받은 선지자로서 직분으로 전한 말씀이 확실히 성취된다는 것을 알게 하고, 말씀의 신실성을 입증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고 말하였습니다(16).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마음은 고통스럽고 전하지 않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증거되고, 그 말씀의 신실성을 깨닫도록 재앙을 간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죄악으로 인해 심판을 받는 것이지만 자신의 민족이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내가 그럴 줄 알았다"라고 조소하며 방관하는 것은 또 다른 죄악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는 자는 인생의 고통보다는 하나님 말씀의 신실성을 우선적으로 증거해야 하며, 인생의 평안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는 것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기도>
하나님, 경고의 말씀 앞에서 지금의 평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자랑하며 그렇게 말한 증거를 요구하는 완악한 백성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재앙이 아니면 죄악을 깨닫지 못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지 않게 하시고,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선포되는 말씀만으로도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