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원의 아침묵상 / 2017. 10. 6 (금)
■ 예레미야 10:17-25
[ 고통 가운데 던지시는 것도 하나님의 자비 ]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도구로 쓰신 바벨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은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가 됩니다. 바벨론의 군사들이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마다 자신의 피난짐을 꾸리기에 바쁩니다(17). 이는 그들이 안전한 성이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기에 평안하리라고 예측하였던 땅에서 쫓겨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압제와 핍박을 당하던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께서 이제 건지셨던 백성을 약속의 땅에서 빼내어 이방의 땅 바벨론에 내던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기 백성을 내던지신 까닭은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18). 이스라엘 백성이 의지하려는 모든 권력을 폐하고, 모아놓은 재물을 잃게 하며, 쌓아올린 것들을 무너뜨리고 나서야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혹 하나님을 찾을까 하는 기대입니다. 심판의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었고,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혹 그들이 짐 꾸러미를 챙긴다하여도 그것은 자신들의 마지막 욕심일뿐, 결국 이스라엘은 벌거벗겨진 채 놋 사슬에 메여 바벨론으로 끌려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52:11). 짐 꾸러미는 약속의 땅에서 이방의 땅 바벨론으로 내던져질 이스라엘의 빈약하고도 초라한 마지막 기대일뿐입니다. 망해 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손에 붙잡고 있고 싶어했던 짐 꾸러미마저도 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배역하며 쌓아 놓은 부와 명예,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망가진다해도 마지막 망가지지 않을 그 무엇을 예비해 놓았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시작되면 그것마저도 헛된 기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애3:33). 모든 방편과 나아갈 길이 막히고 나서야 마지못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완악한 인생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상처가 깊으면 회복도 느린 법입니다. 내가 망해도 먹고 살 수 있도록 예비해 둔 마지막 그 무엇, 그것이 어쩌면 하나님을 신뢰하며 은혜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라고 탄식합니다(19). 자신의 민족 자신의 나라, 자신의 이웃과 형제에게 참혹한 멸망을 전해야 하는 것은 선지자로서도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인 것입니다. 또한, 그도 이스라엘 민족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와같은 심판의 대열에 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중상을 당하였다는 것은 치료하고 회복될 수 있는 시기를 알 수 없다는 것으로서 자신의 민족 자신의 나라 이스라엘의 미래가 예측할 수 없는 암담한 상태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아픔과 고통은 곧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이며 아픔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상처로 인한 중상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고, 또 고통스럽지만 전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성읍이 모두 불에 타서 폐허가 되고,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으리라 장담하였던 예루살렘 성이 무너진 채, 동맹국인 애굽이나 앗수르가 혹 구하여 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조차 끊어졌습니다(20). 높고 호화롭던 성전은 고사하고 광야에서와 같이 장막과 휘장을 칠 여력도 없고 그것을 감당할만한 사람들 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또한, 장막과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다는 것은 그들이 살던 땅에서 쫓겨나 다시 돌아와 장막을 치고 살아갈 기약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와같은 상황이 된 것은 모두 올바른 말씀을 전해야 할 책무가 있던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지도자들의 책임입니다(21). 이들은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보다는 자신들 임의대로 백성의 탐욕이 원하는 대로 전했으며, 그로인해 부와 명성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자신의 책무를 외면하며 얻은 부와 영화가 영원할 것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자신들 뿐만아니라 모든 백성들까지 고통 속에 몰아넣는 악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을 여호와 앞으로 인도해야 했음에도 자신들 조차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여호와의 성전이 들짐승, 즉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전을 수단으로 삼는 자들의 거처가 되도록 방관하며 자리 보전하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옳은 것은 옳다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업장이 되어서도 안되고 장사꾼의 소굴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는 숫자를 물어보시지 않습니다. 헌신되고 충성 된 자가 한 명이라도 있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5:1).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23). 사람이 스스로 자기 길을 지도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서, 사람이 가진 지혜와 지식과 부와 명성이 모두 헛된 것일뿐이며 하나님 만이 인생의 가장 큰 가치임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고통 중에 멸망받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지자의 고백과 같이 중상을 당한 것은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죄악으로 인해 멸망받을 것을 경계하시고, 고통을 통해서라도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24). 그러므로 선지자는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배역하고 자기 스스로 인생의 주인을 자청했던 이스라엘이 징계와 심판을 당한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마땅한 일입니다. 다만, 선지자는 그 징계와 심판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고통을 통해서라도 돌이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자비가 없다면 죄로 인한 사망의 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 선지자는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바벨론을 심판해 달라고 간구합니다(25). 이는 하나님의 심판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자신들을 택하였다는 사실을 모른채 오히려 교만하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살육을 위한 살육으로 몰아간 것을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을 모르고 교만하며 악을 행하는 이방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자신들의 죄악에 대하여는 마땅히 징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한 징계 속에서 하나님의 너그러움이란 고통을 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며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형통이란 사람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노력하는 자의 손길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창.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지 못하는 인생의 수고와 노력은 헛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창3:19). 내 수고가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 주리라 기대하였지만, 엉겅퀴와 가시덤불만 무성하게 자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생임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입니다.
<나의 기도>
탐욕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시간들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라도 돌이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미련하고 어리석어 멸망을 자초하는 길로 가지 않도록 말씀을 주실 때마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