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원의 아침묵상 / 2017. 9. 15 (금)
■ 예레미야 2:9-19
[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 ]
제사장이나 율법학자,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타락하고 배반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운다는 것은 악인들을 대상으로 한 물리적 싸움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싸움은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으려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싸운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아리부'라는 단어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법적으로 고소하겠다는 것이며 원칙대로 법대로 다루겠다는 뜻으로, 죄에 대한 합당한 보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타락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고 하십니다(10). 조건없는 사랑으로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먹이셨을 뿐만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성읍과 나라를 이루게 하신 신을 조롱하듯, 다른 신들을 섬기며 배반한 경우는 세상 어느나라에도 없을 법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서방을 상징하는 깃딤 섬들과 동방을 상징하는 게달을 언급하신 것은 세계 열방을 둘러보아도 그러한 예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민족들도 자신의 신들을 거역하고 버리는 경우가 없는데, 이스라엘은 참 신인 하나님을 버렸습니다(11). 사도바울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역설하였습니다(엡1:3-6).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모두는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놀라운 은혜로 죄인을 구원하시고 복을 주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같이 되는 것은 진노와 심판을 부르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반드시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는 어리석고 무지한 거래를 하는 경우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없는 일입니다. 무역으로 유명하였던 게달과 깃딤 섬들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신과 신이 아닌 무익한 것으로 바꾸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영광의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살아 계시며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자들의 삶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와같은 이스라엘의 배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고 여호와를 멸시하고 버린 죄악은 그들에게 철저한 파괴와 수치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배반과 죄악에 대하여 하늘을 증인삼으십니다(12). 하늘을 증인 삼으신 것은 그 누구도 죄악을 숨길 수도 피할 수도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하늘을 증인 삼으심으로, 그 어떤 죄도 변명할 수 없도록 하십니다. 오늘 이런저런 핑계로 믿음의 길을 떠나 배도의 길을 간 것에 대하여 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명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버린 죄입니다. 둘째는 스스로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13). 물은 곧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웅덩이를 팠으나 그것이 터진 웅덩이들이 되었다는 것은 생명의 역사가 없는 빈 웅덩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물을 얻으려고 웅덩이를 팠으나 그것이 스스로의 무덤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터진 웅덩이는 곧 바알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는 바알을 섬기는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이는 창조때부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증인 된 하늘마저도 놀라고 두려워할 어리석고 무모한 죄악이며, 무시무시한 심판을 불러올 수 밖에 없는 반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스스로 살 길을 찾아서 가는 길이 때때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애굽이나 앗수르와 같은 힘과 권력을 신봉하며 그들의 영화를 부러워하며, 그들이 섬기는 신들을 따라가는 것은, 부귀와 영화가 어디로 부터 오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는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것은 곧 종되었던 자들을 자유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고 탄식하십니다(14). 종이 아닌 아들로 부르셨고, 씨종이 아닌 자유인으로 부르셨으나 스스로 죄의 종이 되고 죄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입니다. 그러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외면하고 배도의 길을 가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우물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도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터진 웅덩이와 같은 바알을 섬긴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삶이 황폐하게 되어 결국은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삶에 닥칠 죽음의 그림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십니다. "성읍들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며,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5-16). 놉과 다바네스는 애굽의 성읍들을 말하는 것으로, 애굽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멸시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실제로 유다는 애굽과의 므깃도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이로인해 요시야 왕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왕하23:29-30). 애굽이 앗수르에 의해서 정복을 당하고 속국으로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놉과 다바네스는 가장 처참하게 유린 당했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토록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약해질 때로 약해진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들 조차도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조롱하는 대적이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참혹한 결과는 보호자이시며 견고한 성읍이 되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17).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나일강의 한 줄기인 시흘의 물" 즉, 애굽의 힘과 권세가 자신들을 앗수르의 위협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18).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애굽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며 죽음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경외하지도 않을 자유를 주장하다가 돌려받은 것은 그들이 의지하던 대상에 의한 배신과 고통 뿐이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고 경고하십니다(19).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는 삶에는 결국 권태와 폐허와 중독과 자멸만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의 기도>
하나님, 스스로 살 길을 찾기 위해 웅덩이를 파지만 결국은 그 웅덩이가 무덤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을 떠나 스스로 교만하며, 세상의 방법과 수단을 구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