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서울 소그룹모임에는 네 분의 새로운 얼굴이 선보였다. 한분은 멀리 해외에서 선교사로 사역을 하시다가 딸의 정신질환 치료차 귀국하셨다가 찾아오셨고, 다른 한분은 병원에서 곧 시력을 잃는다는 판정을 받고 한의원을 찾았다가 한의원 원장님의 소개로 찾아오셨고, 다른 두 분은 기도훈련에 관심을 갖고 찾아왔다면서 구체적인 동기를 밝히는 것을 아꼈다. 그분들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필자의 마음은 스산했다. 멀리 물설고 낯설은 이국땅에서 온갖 고난을 참아내면서 영혼구원을 위해 평생을 바친 선교사님은, 정작 자신의 딸에게 찾아온 몹쓸 질병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과 무기력에 대한 절망감이 깊었을 것이다. 또 다른 한분은 어린 아이를 둔 젊은 엄마였다. 그런데 이제 인생을 꽃피우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데 실명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네 교회가 외면하고 있는 신앙의 능력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왕상18:20~22)
위의 구절은 그 유명한 갈멜산의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내용이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450명과 어떤 신이 진짜인지를 놓고 목숨을 건 기도전투를 벌인 것이다. 그래서 각자 자신이 섬기는 신을 향해 제물을 차려놓고,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우는 쪽이 이기는 것이며, 진 자는 죽임을 당하는 목숨을 건 기도시합이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주시는 것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쳐 죽여 버렸다. 당신이 만약 그 기도시합에 참여한 당사자였다면, 자신이 섬기는 신에 대한 믿음과 목숨을 바꾸어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신앙의 진위를 가지고 목숨을 거는 일은 없다. 우리나라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섬기는 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재산과 목숨을 걸어놓고 판결을 받는 일은 없다.
물론 당신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대자연을 다스리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에 추호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다. 위에서 딸의 정신질환으로 노심초사하는 선교사님이나 실명위기에 있는 자매님의 경우는, 지금까지 믿어온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한 능력을 경험하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네 교회에서는 영접기도를 하고 주일성수를 하는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것을 기정사실화하며, 이를 철썩 같이 믿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심판대 앞에서 알게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네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론은 비 성경적인 내용이 허다하다. 말하자면, 한번구원이면 영원한 구원이라는 식의 구원론의 시각은 성경에 없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성령의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령의 증거나 능력, 변화나 열매가 없는 자기 확신을 성경적인 믿음으로 포장하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구원의 사실을 확인하는 때는 심판대 앞에서이며, 이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 그러나 구원의 결과를 제외한 다른 믿음들은, 그 능력으로 진위를 확인하는 것은 이 땅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위의 구절들은 우리네 교회지도자들이나 교인들에게 곤혹스러운 말씀이다. 믿는 자들은 죄다 기적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인들은 물론 교회지도자들은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무능하고 무기력한 신앙으로 고단하고 팍팍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처지를 외면하고, 옹색한 성경해석으로 자신들의 무능하고 무기력한 믿음을 애써 숨기려 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맞닥뜨린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 사람들이 엊그제 서울 모임에 찾아온 이들이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은 차치하고, 현재 자신들 앞에 펼쳐진 난감하고 곤혹스러운 현실을 더 이상 회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믿음의 상태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약속과는 너무 동떨어진 자신의 믿음의 능력을 외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없는 사람들은 안심해도 될 것인가? 만약 위의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기적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론이고, 그런 믿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에둘러 피하거나, 다른 말씀을 들이대며 물 타기를 하기 일쑤이다.
그런 상황을 마주친 필자라고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그들이 필자에게 찾아온 이유는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이고, 이 문제는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필자가 모를 리가 없다. 지금까지는 귀신들린 현상을 보이는 정신질환자들이 찾아왔지만, 이제 실명이 기정사실화 된 환자까지 찾아오고 있는 현실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긴장하면서, 탁월한 기도의 능력을 요청하여야 한다. 어쨌든 자신들이 지닌 믿음의 진위를 방치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을 미리 점검하게 되었으니 불행하다고 말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이 땅에서 룰루랄라하고 살다가 덜컥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겠는가?